[명량] 영웅을 넘은 성웅 이순신

2022. 11. 22. 19:1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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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명량해전은 어떤 전투였는가

세계 4대 해신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울돌목의 특성을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배를 물리친 조선 최고의 위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신하가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에는 조선 수군의 전함이 12척으로 쓰여 있지만, 나중에 1척이 더 발견되어 총 13척의 전함이 전투에 나섰다고 합니다. 울돌목이란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닷길로, 물살이 빨라 마치 물이 우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며 밀물과 썰물이 6시간마다 교차하며 하루에 4번 물의 흐름이 바뀐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역사적인 명량해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1597년에 일어났습니다.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벌이는 도중에 다시 조선을 공격한 것입니다. 당시 이순신은 부산에 있는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이유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자리에서 쫓겨나 일반 병사의 신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에 이어 다음 지휘관이 된 원균이 칠천 량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조선 수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수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힘이 약해졌음을 알고, 조선 수군이 지키던 남해안을 거쳐 서해로 나아가 육지로 진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남아 있던 배 13척을 가지고 싸울 준비를 했지만, 전함 133척에 3만여 명의 군사를 앞세운 일본과 싸워 승리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지휘관이 되자 적의 상황을 살펴본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길과 조류를 이용하면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고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명량 근처로 옮겼습니다. 1597년 9월 16일, 마침내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의 전함을 일렬로 배치하여 좁은 물길을 지나가려는 일본 수군을 맹공격했습니다. 일본 수군은 좁고 거친 물살에 갇힌 채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전함 31척이 파괴되고 8,000여 명의 군사가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고 물러났습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은 서해 바다를 지키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 

명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임금에게 장계(신하가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올리게 됩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어차피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바다에서의 전투를 포기하고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육지 전투에 합류하라고 권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조선은 패할 거라 생각했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변합니다. 그리고 또 한 장면, 전투에서 동료를 잃은 한 병사가 탈영하다 잡히게 되고 이순신은 그의 목을 베어 군의 기강을 다시 잡습니다. 의기소침하고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칠 생각만 하는 병사들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도록 군영을 모두 불태워버리기까지 합니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대사가 나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하며 다시 한번 군율은 바로잡습니다. 기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준 판타지스러운 영웅 모습이 아닌 그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갈등하고, 심리적으로 느끼는 두려움, 중압감 등 내면적인 모습 또한 잘 표현해 준 영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거북선 이전의 우리나라 전선의 구조와 형식은 주로 해적선과의 싸움을 통해 발전되었습니다.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주로 사용한 전술은 배를 부딪쳐 해적선을 깨뜨리는 방법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해적들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육박전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의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고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거북선이었습니다.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습니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습니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빨랐습니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일제히 총을 쏘았습니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지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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